기록상자/머릿속 드래프트

어버이날, 할머니가 사탕을 주셨다

시작하는모든것들 2025. 5. 5. 21:00

 

올해 아흔.
정확히는 89세.
그런데도 아직도 눈 또렷하시고, 허리도 꼿꼿하신 할머니가 계신다.

책을 하루 종일 손에서 안 놓으시는 분이다.
진짜 독서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
집에 가면 TV보다 책이 먼저 켜져 있고,
옆에는 강아지랑 고양이가 나란히 누워 있다.
동물도 좋아하시고, 조용한 것도 좋아하시는 분이다.

할머니 방은 항상 정갈하다.
책장엔 오래된 소설책들이 빼곡하고,
침대 옆 작은 탁자엔 읽다 만 책, 안경, 작은 메모지가 놓여 있다.
좋은 구절 발견하면 메모지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으신데,
가끔 그걸 모아서 나한테 건네주시기도 한다.


네가 읽어봐. 좋은 말이야. 그렇게.

항상 본인이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
근데 막상 식사 자리가 되면
좋아하는 반찬 앞에서도 늘 같은 말을 하신다.
배불러서 됐다.

 

며칠 전 어버이날 겸 미리 방문했을 때도,
밥 먹고 일어나 인사하려는데
할머니가 조용히 내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주셨다.
말없이 그냥 넣으시길래
뭔가 하고 꺼내봤더니, 사탕 여러 뭉치였다.

그냥 사탕인데 그게 묘하게 먹먹했다.
자기가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걸
말도 없이 꺼내서 주는 사람.
할머니는 늘 그런 식이다.
말 없이 마음을 꺼내 보이시는 분.

'배부르다'는 말도 그렇다.
그 말은 그냥 배가 부르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는 괜찮아, 너 더 먹어.
그런 말이었다.

그 안엔
포만감보다 더 큰 게 숨어 있었다.
배(倍)의 부(富).
배려가 부풀어 있는 부유함.

그 사탕과 그 밥상 위에는
결국 같은 말이 담겨 있었다.

나는 괜찮아. 너 더 먹어.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할머니!